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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곡성(哭聲)’의 흉폭성에 어찌할 바 모르게 되는 기쁨
아이다 토지  × 고바야시 준이치

영화 관련 집필, 소설화를 담당하는 아이다 토지에게 아시아 영화에 대해 A PEOPLE 편집장이 질문해 나가는 대담 연재. 제1화는 일본에서도 히트한 나홍진 감독의 작품 ‘곡성(哭聲)’

고바야시 준이치 (이하 고바야시)  ‘곡성(哭聲)’ (2016)을 보고, 어떠셨나요?

아이다 토지 (이하 아이다)  오랜만에 영화에게 두들겨 맞은 기분입니다. 작가성도 있고. 오리지널리티도 있고. 하지만 우선 재미있다 라는 점이겠지요. 스토리텔링도 물론 있다고 생각하지만 보는 쪽의 근본을 뒤흔드는 무언가 있습니다. 뤼미에르 형제(FRERES LUMIERE)의 ‘기차의 도착’ (L'arrivée d'un train en gare de La Ciotat/1895)은 아니지만 본래 영화가 가지는 기대감이나, 무언가 올 것 같은 예감이나, 두근두근한 느낌이 있어서 보는 이의 추리 능력을 자극하지요. 근원적인 힘의 존재. 엔터테인먼트의 원점이면서 동시에 최첨단인. 감동했습니다.

고바야시  대작영화의 작가주의와 같은 것은, 일본에서는 거의 사멸하였고, 미국에서는 크리스토퍼 놀란 등이 겨우 명맥을 잇고 있지만 현대에서의 메이저 영화 작가주의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Francis Ford Coppola)의 ‘지옥의 묵시록’ (Apocalypse Now/1979)이나 마이클 치미노(Michael Cimino)의 ‘천국의 문’ (Heaven's Gate/1980)같은 야만적인 대작 작가영화가 2016년에도 이런 형태로 존재할 수 있다고. 영화 그 자체도 사건성이 있는 영화이겠네요.

아이다  장르 영화의 복합적인 형태이기는 하네요. 종교영화이자 범죄영화이자 공포영화이자 가족영화이기도 한. 하지만 장르성이 점점 전복되어 갑니다. 장르보다 더욱 재미있는 게 있다고! 라고 하는. 장르 영화라는 이론에 타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면 완전히 다른 탈 것에 타고 있었고 모르는 장소에 도착했다. 그런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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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바야시  모든 스토리는 (이미 모두) 이야기 된 바 있다. 라는 사고방식이 있지요. 이에 대해 2017년에는 이런 접근 방법으로 하면 아직도 대작 작가주의영화를 찍을 수 있다, 새로운 스토리를 이야기할 수 있다는 발견을 할 수 있었습니다.

아이다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런 차원을 벗어나서 마치 우주의 섭리를 그려낸 듯한 느낌조차 받았습니다.

고바야시  형태가 없는 것을 그리고 있습니다. 현대판 형이상학적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2001: A Space Odyssey/1968)같은 영화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무엇이 놀라운가 하면 이 영화의 기획서가 통과된 것입니다. 일단 요즘 일본이나 미국에서도 통과하지 못할 각본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이해가 안되니까요 (웃음)

아이다  한국은 좋은 뜻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해요. 크리에이터도, 제작 시스템도, 흥행 형태도 대단하겠지만 무엇보다 관객들이 굉장해요. 이 영화가 연간 순위 7위에 680만명이 봤다는 게 상상도 할 수 없지요. 지금 일본도 미국도 관객이 ‘이해하는’ 것이 중요해 졌어요. 그에 반해 영화는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본래 야만적이고 흉폭한 것이라고. 한국 관객들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도량을 가지고 있어요.

고바야시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것도, 이런 영화가 성공하는 것도 정말 부럽다고 생각했고, 한국 영화관객의 높은 문화 수준에 질투조차 했습니다.

아이다  지금 일본이었다면, 관객의 리뷰를 보게 되면 많은 영화에 ‘복선이 회수되지 않아서 글렀어’라거나 ‘이치에 맞는건가’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 상관 없잖아요. ‘곡성(哭聲)’을 보고 있으면 조금도 망설임이 없어요. 이만큼 긴 영화라면 처지는 장면도 있잖아요. 이제부터 그렇겠구나 하는 부분에, 황정민이 연기하는 무속인이 나타나서 영화가 별안간 재미있어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