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드워드 양 ‘미래의 추억’〜 그 새로운 세계를 향해서
아이다 토지 × 고바야시 준이치

영화 관련 집필, 소설화를 담당하는 아이다 토지에게 아시아 영화에 대해 A PEOPLE 편집장이 질문해 나가는 대담 연재. 4번째 테마는 6월9일에 열리는 토크라이브에서도 거론되는 에드워드 양.

고바야시 준이치 (이하 고바야시) ‘타이완 거장 걸작선 2018’이 개최 중입니다. 완련의 장편이 일본에서 처음 개봉되는 등 의의있은 기획인데요. 그중 에드워드 양의 작품이 5편, 상영되고 있어요. 작년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재개봉으로 시작된 에드워드 양 재평가 움직임은 멈추지 않고 지금 시부야 TSUTAYA에 가보면 대부분 대여 중입니다. 이번 걸작선에서 상영되는 데뷔작 ‘광음적고사’와 유작인 ‘하나 그리고 둘’을 중심으로 에드워드 양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아이다 토지 (이하 아이다) 우리 세대는 미니 시어터 시대였고, 특권적인 의식 속에서 에드워드 양을 바라보기도 했지만 시네콘 시대의 지금 사람들은 그런 느낌은 없겠지요. 영화를 심플하게 바라보고, 전설적인 작품을 접해보니 역시 굉장했다라는 느낌. 문턱이 굉장히 낮아졌어요. 이는 굉장히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과 ‘공포분자’는 영화사에 남을 압도적인 작품이지만 그렇지 않는 세계가 ‘광음적고사’, ‘하나 그리고 둘’에 있어요. 지금 보면 이 두 작품의 원이 연결된 느낌이 있어요. 둘다 남자 아이가 나오지요. 어린 아이. 그가 동경하는 여자아이는 커요. 소년이 여자아이를 올려다 본다는 동경이 에드워드 양의 중요한 텀일거에요.

*

‘광음적고사’

고바야시 ‘광음적고사’는 일본 제목 그대로 ‘희망’에 관한 이야기잖아요. ‘하나 그리고 둘’는 포근하고 부드러운 영화로 모이지만 절망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하나 그리고 둘’의 세계에서는 주인공 소년만이 절망하지 않아요. 누운 채 눈을 뜨지 않는 할머니에게 양양이 말을 걸지 않는 것이 포인트라고 생각합니다. 양양은 보이는 것만 믿어요. 보이는 것만 보는 사람은 현재를 살고 있다는 것이라고 봐요. 어른이 되면 모두 미래가 보이게 됩니다. 있을 법한 미래를 상정해 버린다는 것이겠지요. 전반부에 어른이 물건을 찾고 있고, 찾고 있던 것을 잊어버리는 신이 몇번인가 나오지요. 그건 미래를 잊어버린 상태를 나타냅니다. 아이와 같은 상태입니다. ‘하나 그리고 둘’에서 스토리를 발동하게 하는 것은, 어머니가 ‘이제 무리야, 못해먹겠어’라고 하고 없어져 버리는 부분. 어머니의 절망에서 시작됩니다. 그 다음 아버지는 과거로부터 복수를 당하게 되고 누나는 기대했던 있을 법한 미래로부터 배신당합니다.

아이다 양양이 사람의 뒷모습을 찍으려고 하는 것이 중요한 점이라고 생각해요. 안이한 희망이 아니다. 흔해 빠진 절망도 아니다. 얼굴은 보이지 않잖아요. 그래도 얼굴은 어딘가를 향해 있어요.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 지는 모르지만 저쪽을 보고 있다는 것은 미래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고 한들. 미래에는 좋은 일이 있을 거야 같이 밝은 미래를 바라고 있지는 않더라도요. 하지만 인간은 저쪽을 보며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일 겁니다. 심플하지만 미적지근한 메시지가 아니에요. 이는 ‘영화의 무의식’일지도 모르지만 대단한 걸 해냈다고 생각해요.

고바야시  ‘광음적고사’의 미래는 다가온 대학생에게 공책을 가져가면 공부를 알려주고, 사랑이 시작되는 거 아닐까?라는 미래지요. 하지만 갔더니 언니가 있었고 키스를 하고 있어 절망한다는. 초경도 시작하고 어른이 된다. 절망도 포함한 타이틀의 희망이었구나 라는 느낌의. 에드워드 양의 세계에는 상대방이 있고 바라던 건 대부분 배신 당한다는 구조가 있어요. 어긋나는. 그런 걸 계속 해 온 것 같은 느낌. 사랑을 하면 미래를 살아가 버린다. 그건 멋진 일이지만, 잃기 시작한다는 것. 아이로 있었을 때는 지금만 보고 있으니까 잃을 것은 없다. 있을 법한 미래의 최초의 형태가 사랑으로 표현된 것이겠지요. 양양도 현실에서만 살았지만 이윽고 키가 큰 여자아이와의 사랑으로 있을 법한 미래를 처음으로 상상해 버립니다. 다시말해 어른이 되어 간다. 그러니까 마지막에 ‘나이 들었네’라고 그가 말하는 거군요.

아이다 이렇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해 버리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미래라는 건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 다는 것이 어떤 형태의 에드워드 양다운 결론이겠지요.

고바야시 그것이 여러 군상으로 돌아가지요. ‘공포분자’도 ‘마작’도 그렇지요.

*

‘공포분자’

아이다 뒤엉켜 있지요. 그런 의미에서 미래는 생각대로 되지 않지만 살아갈 가치는 있다고.

고바야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 ‘고령가 소년 살인 사건’이었고,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 ‘하나 그리고 둘’.